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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00년](27)서백파, 새 중국은 여기에서 걸어나왔다 ...

나연 2021-6-11 00:01 길림신문 25 0

摘要:  1948년 5월 27일, 모택동은 당시 중공중앙 기관 소재지인 서백파에 도착해 주덕, 류소기, 주은래, 임필시와 회합했다.서백파, 이 이름 없는 작은 산촌은 력사의 선택으로 ‘모주석과 당중앙이 북평에 진입해 전 중국 ...

1948년 5월 27일, 모택동은 당시 중공중앙 기관 소재지인 서백파에 도착해 주덕, 류소기, 주은래, 임필시와 회합했다.

서백파, 이 이름 없는 작은 산촌은 력사의 선택으로 ‘모주석과 당중앙이 북평에 진입해 전 중국을 해방한 최후의 농촌 지휘소'로 되였다.

서백파에 주둔한 후 모택동은 높은 곳에 올라 서백파촌을 굽어보며 말했다. “서백파, 과연 좋은 곳이로다. 이 지휘부를 잘 선택했습니다.”

이해에 모택동은 55세, 주덕은 62세, 류소기는 50세, 주은래는 50세, 임필시는 44세였다. 이들은 함께 서백파의 흙집 작은 방안에서 책략을 세우며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할 중국의 미래를 설계하고 연구하고 제정했다. 서백파는 정식으로 중공중앙의 새 소재지로 되였으며 해방전쟁을 지휘하는 ‘지휘 중추'로 되였다.

서백파의 중앙뜨락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낮은 흙벽돌집 네칸이 있다. 이곳이 바로 해방군 총지휘부 겸 군위작전실이다. 

4간집 총 면적이라야 겨우 35평방메터, 바로 여기서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은 3대전역을 포함한 24차의 전역을 조직 지휘하며 새 중국을 세웠다. 이곳은 세계상 가장 작은 지휘부라고 할 수 있다.

주은래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람도 총도 식량도 아닌 전보만 내보냈다.”

1948년 9월 12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사이에 료심, 회해, 평진 3대전역이 합계 142일간 지속되였다. 이 사이 서백파에 위치한 중공중앙, 중앙군위가 전선에로 발송한 전보는 408통으로서 서백파의 기요일군들은 매일 평균 4000~ 5000자를 발송하고 접수했다. 142일간 408통의 전보 그리고 24차의 전역을 통해 국민당 군대 222만여명을 섬멸했다.

1948년 12월 31일, 장개석은 곧 발표할 ‘원단 공문'을 심열하고 있었다.

이 때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한편의 신년축사가 장개석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 문장의 작자가 바로 서백파에 있는 모택동이였던 것이다.

이 문장에서 모택동은 호매롭게 선포했다.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은 장강이남으로 진군할 것이다.”

“1949년, 우리는 경제전선에서 1948년보다 더욱 위대한 성과를 취득할 것이다.”

“1949년,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을 선포할 것이다.”

서백파에서 탄생한 이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란 문장은 특수한 력사시기에 중국혁명 진척에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1949년 3월 5일, 중국공산당 제7기 2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장은 중앙뜨락의 서북 모퉁이에 설치되였는데 바로 림시로 설치한 중앙 취사방이였다.

회의에 출석한 중공중앙 위원은 모두 34명, 이틀간의 촬영은 중앙 5대 서기들인 모택동, 주덕, 류소기, 주은래, 임필시 그리고 전국의 여러 전장에서 달려온 팽덕회, 등소평, 섭영진, 습중훈 등 많은 개국 공신들을 포함한 영상 자료를 남겼다.

모든 준비가 다 되자 오후 2시 쯤 모택동이 웃음 띤 얼굴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는 우선 보고를 진술했다. 보고에서 모택동은 45월에 남경을 점령한 후 북평에서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고 련합정부를 설립하며 수도는 북평으로 정할 계획을 제출했다.

연설의 마지막에 모택동은 강의한 목소리로 전당에 대한 요구-‘두가지 반드시'를 제출했다. 즉 반드시 동지들로 하여금 계속해 겸허하고 근신하고 교만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는 작풍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반드시 동지들로 하여금 계속해 간고분투의 작풍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 ‘취사방에서의 성회'는 8일간의 시간으로 ‘건국대업'을 확립하고 군사, 정치, 경제, 외교 등 각 방면으로부터 사람들 동경을 자아내는 대국의 청사진을 그려냈다.

1949년 3월 13일, 중국공산당 제7기 2차 전원회의가 승리적으로 페막되였다. 10일 후 중공중앙은 북평으로 향발해 ‘건국대업'을 떠메기로 하였다. 새 중국이 서백파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걸어오게 된 것이였다.

1949년 3월 23일, 곧 서백파를 떠나게 된 모택동은 심히 흥분된 모습이였다. 그는 주은래에게 “오늘 북평에 들어가 ‘시험을 보'게 되였구만.” 라고 말했다. 이에 주은래는 웃으며 “우리 모두 합격할 수 있습니다. 되돌아올 수 없지요.”라고 말했다. 이에 모택동은 큰 손을 휘두르며 정중하게 말했다. “되돌아오면 실패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리자성이 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따고저 하는 것입니다.”

3월 25일, 이른 아침 6시 좌우, 렬차 한대가 서서히 청화원역에 들어섰다. 모택동이 첫 사람으로 차에서 내렸다. 꼬박 30년이 지나서 그는 재차 북평의 땅을 밟은 것이다.

오후 5시, 각계 대표들이 일제히 북평 서원비행장에 모였다. 모택동이 나타나자 비행장은 들끓었다. 환호소리 속에서 중공중앙이 북평에 진주한 후 첫 열병식이 성대히 거행되였다.

그 뒤를 이어 중국 력사 진척에 영양주는 일련의 대사들이 북평이란 이 도시에서 일어났다……

/CCTV위챗공중계정 편역 김정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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